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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친 순수함은 죄인가? -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읽고

by 에밀레죵 2022. 3. 14.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민음사

 

 

<인간실격>은 다자이 오사무가 생전 마지막으로 완성한 소설이자 그의 대표작이다. 


<인간실격>을 이야기하면서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삶에 대해 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듯 하다. 주인공 요조의 삶이 다자이 본인의 삶과 무척이나 닮아 있기 때문이다. 다자이 오사무는 지역에서 손꼽히는 유지 가문이었던 아오모리현 쓰시마 가문에서 태어나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런데 집안이 고리대금업으로 부를 축적하여 이에 대한 죄책감이 다자이에게 큰 상처를 입혔고, 이는 이후 다자이를 공산주의에 심취하게 하기도 한다. 그는 고등학교 때 처음 자살을 시도한 이후로 5번째 시도 끝에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인간실격>은 서문에서 어떤 이가 한 남자의 사진 3장을 보면서 시작한다. 첫 번째 사진은 어린 남자아이가 기묘하게 웃고 있는 사진, 두 번째 사진은 아이가 자라나 자연스럽게 웃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터득하게 된 듯한 미남 학생의 사진, 세 번째 사진은 희끗희끗한 머리의 너무도 평범한 얼굴을 한, 중년처럼 보이나 실은 27살인 남자의 사진이다. 각 사진은 본문에서 각 수기 당시 주인공 요조의 대표적 이미지를 나타내는 사진이다. 다자이의 글은 매우 이미지화가 잘 되어서 읽으면서 끊임없이 상상하며 읽는 것이 가능하다. 


인간실격을 관통하는 두개의 큰 줄기는 ‘죄의식’과 ‘순수함’이다. 

요조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나쁜 사람이라는 죄의식에 시달린다. 술을 마시며 죄의 반의어를 찾는 요조. 선은 악의, 신은 사탄의, 구원은 고뇌의, 사랑은 증오의, 빛은 어둠의 반의어라서, 기도, 회개, 고백은 유의어라서 모두 죄의 반의어가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떠올린다. 요조가 이런 죄의식을 평생 안고 살 게 된 정확한 이유는 나오지 않지만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억압적인 육아방식과 어린 시절의 성추행 때문이라고 짐작해볼 뿐이다.

요조의 죄책감은 그의 순수함에 기인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요조가 보기에는 모순적이고 위선적인 넙치와 호리키가 사회에서 당당하게 기능하는 반면, 요조는 (어쩌면 너무 착하고 순수하기 때문에) 인간실격자 취급을 당한다. 일본의 패전 이후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모순적 모습을 보면서 상실감을 느끼는 다자이의 감정을 담은 것은 아닐까 싶다. 

<인간실격>에서는 요조의 아내, 연인 등 여성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그런데 어쩌면 요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여성인 요조의 어머니가 부재한다. 자살방조죄 사건으로 경찰서에 온 요조를 보고 경찰이 요조가 아닌 ‘이렇게 미남을 낳은 어머니가 나쁘다’ 언급한 것 외에는 이상하리만큼 어머니에 관련된 에피소드가 없다.  다자이 본인의 모친이 병약하여 이모와 유모 손에 자라난 것이 영향을 미쳤을까.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은 고전문학 입문작이라고 한다. 그만큼 읽기 쉽게 쓰여져 진입장벽이 낮으면서도 인간 심리에 대한 깊은 이해를 담고 있다는 뜻인데, 왜 그렇게 불리는지 알 것 같다. <인간실격>을 시작으로 훌륭한 고전작품을 더 많이 읽게 되길! 

 


인간의 삶에는 서로 속이면서 이상하게도 전혀 상처 입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이 충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p26).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이 저를 죽여줬으면 하고 바란 적은 여러 번 있지만 남을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상대방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일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p31).

불행. 이 세상에는 갖가지 불행한 사람이, 아니 불행한 사람만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죠. 그러나 그 사람들의 불행은 소위 세상이라는 것에 당당하게 항의할 수 있는 불행이고, 또 ‘세상’도 그 사람들의 항의를 쉽게 이해하고 동정해 줍니다. 그러나 제 불행은 모두 제 죄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항의할 수 없었고, 또 우물쭈물 한마디라도 항의 비슷한 얘기를 하려하면 넙치가 아니더라도 세상 사람들 전부가 뻔뻔스럽게 잘도 이런 말을 하는군 하고 어이없어 할 것이 뻔했습니다. 제가 세상에서 말하는 ‘방자한 놈’인지 아니면 반대로 마음이 너무 약한 놈인건지 저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죄악덩어리인 듯, 끝도 없이 점점 더 불행해지기만 할 뿐, 막을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은 없었던 것입니다(p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