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렸을 때 인상깊게 읽었던 안네의 일기. 이번에 77년만에 안네의 가족들을 밀고한 사람이 드러났다는 기사를 읽고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읽게 되었다. 예전에 읽었던 책은 어린이용 버전이어서 삭제된 내용이 많기도 했고, 나도 나이가 들며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배경지식을 쌓고 읽어서 그런지 전혀 다른 책을 읽는 듯한 느낌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관련 글들을 읽으면 항상 만약 비슷한 일들이 현대에 일어난다면 나는 언제 이를 차릴 수 있을 것인지, 어디로 가야 이를 벗어날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된다. 실제로 유럽에서 유대인에 대한 차별은 오랜 기간에 걸쳐 계속된 것이었고, 나치 독일이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대학살을 자행하리라는 것을 예상하기는 너무나 어려웠을 것 같다. 우리는 어떤 징후를 보고 직장과 이웃을 버리고 지금 당장 떠나야 한다는걸 알아차릴 수 있을까.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고민이다. 영국, 미국, 캐나다로 간 유대인과 폴란드, 네덜란드로 간 유대인의 운명은 극명하게 달랐다. 끓는 물 속의 개구리가 생각난다. 차별이 학살로 넘어가는 시점과 그 징후는 무엇인가.
악이 정의가 되는 세상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은 무엇이 정의인지를 배우기 어렵다. 영화 <모가디슈>에서 폭력에 노출된 아이들은 목숨을 걸고 도망치는 사람들을 향해 총을 쏘면서 웃고 즐거워한다. 그렇게 막막한 현실 속에서도 안네가 인간의 선함을 믿고 나아가 행복에 대해 고민했다는 것이 놀랍다. 그 좁은 은신처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 갈등을 겪으면서도(코로나 시대에 자가격리 때문에 가정불화가 증가했다는 우스갯소리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그 사람들을 사랑하고 이해하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준다.
안네는 평범한 주부로서의 삶을 거부하고 전쟁이 끝나면 유명한 신문기자나 작가가 되고 싶다고 키티에게 말한다. 죽으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이름을 남기고 싶다고 한다. 비록 안네는 제2차 세계대전을 살아남지 못했지만 그래도 안네의 일기가 이처럼 출판되어 전쟁의 비극을 고발하고 안네의 소원을 이루게 해주어 다행이다.
이제 내가 왜 일기를 쓰기 시작했는가 하는 이유가 분명해졌어. 그것은 내게 참된 친구가 없기 때문이야. 열세 살짜리 소녀가 이 세상에서 고독을 느낀다면 믿을 사람이 없을 테고, 또 사실 그럴 리도 없으므로 문제를 더 분명히 하겠어. 내게는 정다운 부모님과 열다섯 살 된 언니가 있어. 그리고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서른 명은 돼. 남자친구들도 많아. 그들은 나를 잠깐 보려고 애를 쓰고, 벽에 걸린 거울로라도 내 모습을 엿보려고 기웃거리지. 친절한 아저씨와 아주머니도 계셔. 좋은 집도 있고,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어. 그러나 친구들이 모이면 웃고 떠들며 늘 있는 일이나 이야기할 뿐 도무지 소용없어. 친구들과 마음을 통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고민의 원인이야. 아마 나에게는 다른 사람을 믿는 마음이 없는가 봐. 그렇지만 그렇다 해도 나 자신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래서 이 일기를 쓰기로 한거야(p21).
무서워하고 쓸쓸해하고 불행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치료방법은 어느 곳이든 하늘과 자연과 신하고만 함께 있을 수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닐까? 그때 비로소 하느님이 자연의 소박한 아름다움 속에서 인간의 행복을 지원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야. 자연이 존재하는 한 - 그것은 항상 존재하는 법이지만 - 어떠한 환경 속에 있더라도 모든 슬픔에 대해선 언제나 위안에 따르게 마련이야(p214).
행복한 사람은 누구든 다른 사람들까지 행복하게 만드는 법이야. 용기와 신념을 가진 사람은 결코 불행 속에서 죽지 않아(p232).
1. 안네의 가족을 밀고한 사람에 대한 기사
(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D&mid=sec&sid1=104&oid=025&aid=0003167247)
2. 안네의 일기 속 은신처를 인터넷 가상현실로 구현한 사이트. 안네와 은신처 속 사람들이 어떠한 환경 속에서 생활했는지 실감나게 볼 수 있다.
'책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나친 순수함은 죄인가? -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읽고 (0) | 2022.03.14 |
---|---|
그까짓 아파트가 뭐길래? - 조남주의 <서영동 이야기>를 읽고 (0) | 2022.03.05 |
2021년에 읽은 책 BEST 3 👏🏻 (0) | 2022.02.08 |
문유석의 <최소한의 선의>를 읽고 (0) | 2022.02.06 |
하성란의 <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를 읽고 (0) | 2021.01.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