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수염의 첫번째 아내>는 하성란 작가의 단편소설 11편을 엮어 만든 책이다. 이 책을 알게 된 건 이 책이 미국 출판계 최고 권위 서평지인 ‘퍼블리셔스 위클리(Publisher’s Weekly)’의 2020년의 책 톱 10에 올랐다는 기사를 접하면서다. 2002년에 낸 소설집이 2020년에야 리스트에 올랐으니 새삼스럽다(중앙일보, 2020. 11. 13. <하성란 18년 전 쓴 소설, 미국 '올해의 책 톱 10 뽑혔다, https://news.joins.com/article/23919442). 이 책은 ‘일상의 사회문제를 장르적으로 비틀어 낸 단편집이다. 작가는 비극적 사건들을 놀랍도록 담담한 어조로 풀어낸다. 그 내용의 무게 때문인지 술술 읽히는 책은 아니지만 미스테리/스릴러적인 요소로 인해 책을 손에 놓을 수 없어 단번에 읽어내린 책이다.
11편의 단편소설이 모두 인상깊고 마음에 들어 그 중 가장 마음에 드는 5편을 고르기가 엄청 힘들었다. 사실 11편 중 인상깊은 5편이라니... 선정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수준이다. 그만큼 각각의 이야기들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1. 별 모양의 얼룩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사고(1999)를 모티브로 한 소설이다. 주인공은 청소년수련원에서 화재로 사망한 유치원생의 어머니이다. 아이들을 조문하기 위해 수련원이 있던 장소로 모인 아이들의 부모들은 돌아오는길에 화재 당일 수련원에서 걸어나오는 아이를 봤다는 남자의 말을 듣는다. 별 모양의 브로치를 가슴에 달고 울고 있었다는 아이. 주인공은 그 날 아침 아이의 옷에 별 모양의 얼룩이 생겼다는 사실을 깨닫고 혹여 남자가 자신의 아이를 본 것은 아닐까 싶어 아이를 찾는다. 본인의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기대할 수밖에 없는 마음, 생전에 해주지 못한 것만 생각나 아리는 마음이 잘 묘사된 소설인 것 같다.
2. 푸른 수염의 첫번째 아내
프랑스의 ‘블루비어드’라는 잔혹동화에 작가의 상상력을 더한 소설이다. ‘블루비어드’에서 주인공인 블루비어드는 여러 차례 결혼을 하지만 연이어 아내들이 죽는다. 아내들이 블루비어드의 경고를 무시하고 성 안 일층 복도 끝 방문을 열어 전 부인들의 시체를 발견한 탓이다. 그렇다면 블루비어드의 첫 번째 아내는 그 방에서 무엇을 발견해서 죽음을 당했던 것일까에 대한 의문이 남는데, 하성란 작가는 그에 대한 하나의 답을 제안하고 있다. ‘첫번째 아내’라는 제목은 부모의 지원을 받기 위해 본인의 성정체성을 위장하여 결혼한 제이슨이 두번째, 세번째 아내를 계속하여 맞이할 것이라는 점을 암시하는 듯 하다.
3. 파리
‘파리’는 ‘우순경 총기난사 사건(1982)’을 떠올리게 하는데, 서울에서 시골 마을로 내려온 사내가 고립된 시골 사회에서 어떻게 서서히 미쳐가는지 보여준다. 주인공이 느끼는 답답함, 압박감, 초조함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분노를 쌓아오던 주인공을 폭발하게 한 건 제목의 ‘파리’였다. 어찌보면 너무나도 사소한 것을 이유로 분노를 쏟아내는 주인공. 파리처럼 주인공도 조그만 시골 사회의 불청객이었을 것이다.
4. 밤의 밀렵
‘밤의 밀렵’도 위의 ‘파리’처럼 시골 사회의 폐쇄성과 부패성을 보여준다. 서울에서 내려온 김진성이 늦은 밤 숲 속에서 벌이는 인간사냥조차 쉬쉬하고 덮는 시골 사람들, 사건의 전말을 어림짐작하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주인공에게 업무를 넘기는 전임자. 가장 무서운 것은 역시 어둠도 동물도 아닌 인간이다.
5. 저 푸른 초원 위에
소아마비를 앓는 아이를 가진 부부. 부부는 서울 외곽에 마당 너른 집을 짓는다. 마당에서 뛰어노는 아이를 꿈꿨지만 걷지 못하는 아이는 정물에 가까웠다. 결국 개를 기르고 나서야 행복해하는 남편. 그런데 동네의 개들이 사라진다. 와이프는 사방팔방 개를 찾아나서지만 마침내 개를 찾아낸 날 아이는 사라진다. 비교적 은유가 분명해서 이해하기가 수월했던 이야기이다. 부부는 강아지가 오고 나서야 행복을 되찾았다는 생각 하에 개를 찾아나서지만 그럴수록 아이는 고립되고 혼자 남겨진다. 결국 아이는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정체 모를 ‘누나’를 따라간다. 아이는 어디로 사라진걸까.
하성란 작가의 소설은 지극히 개인적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이는 사회적 비극이기도 하다. 감정을 뺀 담담한 어투로 서술되지만 읽다보면 어느덧 각 소설의 캐릭터의 감정선을 따라가고 있다. 다만 소설을 읽으면서 분명하지 않은 부분들이 있는데 소설집 뒤에 수록된 해설(한기욱, ‘정교한 언어, 다양한 양식들’)을 읽으면 그 뜻이 보다 분명해진다. 이 소설에 관한 해설의 평가 중 가장 마음에 와닿던 부분을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하성란 작가의 군더더기 없는 언어구사는 우아하거나 아름답다기보다 정확하고, 때론 그 정확함이 섬뜩하다. 그러나 이 섬뜩함 속에 우리 시대의 아픈 진실이 드러난다(p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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